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리고리 쿨리크 (문단 편집) === 전간기 === 적백내전시 쌓은 스탈린과의 친분은 그의 승진을 보장했다. 레닌의 사후 서기장이 된 스탈린은 정적 [[트로츠키]]의 입김이 셌던 붉은 군대 내의 자기 사람들을 특별히 챙겼으며, 쿨리크도 마찬가지였다. 스탈린의 비호아래서 능력에 상관없이 계속 승진한다. 1921년 6월에는 북캅카스 군관구의 포병 지휘관에 임명되고 1926년에 3년간 소련군 포병총감을 역임했으며 1932년에는 [[프룬제 군사대학]]을 졸업하고 제3소총군단의 지휘관이 된다. 1936년에는 [[스페인 내전]]에 군사 고문으로 개입했다. [[대숙청]]이 진행중이던 1937년에 다시 포병총감에 부임한다. 대숙청 기간동안 군 수뇌부 대부분을 날려버린 스탈린은 쿨리크를 적극 신뢰하였고, 이후 쿨리크는 소련군의 무기 개발과 포병 전력을 주도하게 된다. 이 시기에 의외로 쿨리크는 여러 장교들과 함께 스탈린에게 '고위장교단에 대한 숙청을 멈추어 달라'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.[* 이렇게 쿨리크와 편지를 보낸 사브첸코, 알릴루예프, 파블로프는 모두 독소전쟁을 전후해 처형된다. (알릴루예프는 의문사) 스탈린의 뒤끝을 보여주는 일화다. 알릴루예프는 스탈린의 처남이었음에도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망한다.] 1939년 1월 소련 국방차관에 임명되었다. 동년 여름 [[할힌골 전투]]에 [[주코프]]가 지휘하는 부대의 포병 운용을 맡기 위해 파견되었으나, 주코프의 지휘관을 간섭하다가 7월 해임되어 모스크바로 돌아왔다. 1939년 3월, 전연방공산당 18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. 1939년 9월, [[폴란드 침공]]에 참전했다. 1940년 [[겨울전쟁]]에 참전해 소련 포병부대를 지휘했는데, 이때는 의외로 전공을 세워서 소련 영웅 칭호를 받고 7번째 소련 원수로 승진했다. 이때 같이 원수로 진급한 사람이 [[보리스 샤포시니코프]] 총참모장, [[세묜 티모셴코]]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